"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렘 29:11)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자신의 의가 되고 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택하는 것은 고역이 아닙니다. 그분의 생각은 나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희망을 주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을 새롭게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해 주셔야 한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모든 것을 받았으니 그것을 더 잘 신뢰하기 위해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가 생각을 새롭게 하지 않기로 오늘 결정 하더라도 주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혹여,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기로 결정한다고 해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삶은 고달파지겠지만...
원래부터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우릴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시는 사역, 봉사, 신앙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한 뒤, 그 사랑에 감복하여 하고 싶을 때 하는 사역과 봉사만이 의미 있고 진짜입니다. 그리고 진짜에만 열매가 맺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깨달을까요?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계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기에 (엡 3:18)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다고 해서 어디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를 내리는 것은 하늘의 전권에 달렸으나 그 비를 맞고 싶으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듯이, 계시란 온전히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것이 맞지만 우리 쪽에서도 계시를 받을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그 자세란 내 쪽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의 시간을 갖고, 계시를 구하는 마음 등입니다.
-그레이스 묵상집 번역가 반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