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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만난 자의 이웃

 관리자
2010.02.17 07:18:48 :4191 

어떤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해서 이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을 한다는 것은 자신은 알고 있는데 상대방이 아는가 모르는가 물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근본된 생각을 아셨기에 율법에 있는 대로 “네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 율법사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있었고, 또한 이 사람은 그러한 일을 자신이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신 것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전체 다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 달음이니라.”(롬3;20)

 

이 세상에 육체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와서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 고 있으며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전체가 “죄투성이”이기 때문에 죄인들이 “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힘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한 그것이 살인죄에 해당하는 율법의 저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품은 생각조차도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인 것과 저주받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우리를 살게 하는 율법은 행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요청해야 되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는 그 위선과 거만으로 자기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면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 이 누굽니까? 나는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이웃이 누군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자기를 알지 못하는 율법사에게 그의 상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 [강도 만난 자]에 대한 비유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 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뿐 아니라 옷까지 다 빼앗기고 때려서 거반 죽여 놓고 버리고 갔기에 이 사람은 그대로 두면 죽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가려진 교회에서는 누가복음 10장에 있는 이 말씀에 귀중한 영적인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훈으로 이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일 끝에 가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그 말씀만 가지고 너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주라는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놓쳐버리는데서 발생한 것입니다.

 

요즘 구제하는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분들을 보면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여 이웃을 도우면 영생을 얻는다고 가리키는데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육신적으로 도와주는 구제사업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구제하는 사람들 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을 치료해 주고 환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것도 착한 일이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살게 하고 병든 사람 고쳐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영원히 지옥 갈 영혼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10장 38절)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셨는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하셨던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것 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착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불쌍한 사람 이 너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 고 평생에 한을 품고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죽음 건너편에 영원히 지옥 갈 사람인 것입니다. 

 2월23일 대구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시민회관이 바로 대구역 옆에 있는데 그곳에는 많은 위문객들이 모여 있었고 지하도의 벽면에는 위로의 글과 흰국화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대구여 울지마오....]

 

거기에 적힌 글을 읽어 가다가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참사자들과 유족들에 대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돌아오면서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죽음을 준비한 자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하 는 생각에 정말로 그들이 갇힌 지하철 안에서 얼마나 뜨거웠을까? 또한 지옥은 얼마나 뜨거울까? 만감이 교차되며 수원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상담이 있어서 곧바로 교회로 갔는데. 상담중 말씀을 듣던 분이 대구 지하철 참사로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지하철역은 대구설교가 있을 때마다 타고 가다가 지나치는 곳이었기에 느낌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내 영혼이 가야할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 지하철을 탄 사람들 중에는 가난하게 살던 사람도 있고 부 유하게 살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지옥 갈 영혼은 다 함께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해야할 가장 착한 일입니다.

 

여기에 강도 만나서 죽게 된 사람을 육신적으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돌 봐주어야 된다는 교훈으로만 생각하면 이 성경이 도덕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도덕책은 이 성경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서 매를 맞아 거반 죽게 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타락되어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간 인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고, 여리고성은 죄악의 성을 말합니다.

 

강도 만난 자는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된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고 강도는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얻어터져서 비참하게 되어 거반 죽게 된 모습은 사람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육신적으로 남을 도와주기 전에 내가 먼저 강도 만난 사람처럼 내 영혼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내가 도와줄 이웃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 줄 이웃을 찾아야 됩니다. 우리를 구원해 줄 이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육신만 구제하여 도와주고 그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못한다면 그 영혼은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떡 얻어먹으러 쫓아다 니는 사람도 있었고 병고침 받으려고 쫓아다닌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이 임금 되면 독립 시켜줄 줄 알고 쫓아다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을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떡을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들한테 예수님은 떡을 만들어주지 않고 생명의 떡에 대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 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6;26-27)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너희에 게 줄 떡은 너희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 졌다.” 하였더니 사람들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하며 다 흩어졌습니다.

 

육신의 허기를 채워주는 떡을 만들어줄 때는 구름 떼처럼 따라다니다가 그 떡을 안 주고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니까 재미없다고 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도 가려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 로 가오리까.”했던 것입니다.

 

강도만나서 죽게 된 사람에 관한 말씀은 육신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된다는 교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제에 대한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율법사나 모든 사람들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된 모습처럼 자신의 영혼이 죄에 빠져 죽어가는 처참한 형편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혼이 바로 이렇게 죄로 인해 처참하게 죽어가는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 율법사처럼 무엇을 해서 의롭게 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도 합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긴 후 때려서 거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기에,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우리는 살아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100퍼센트 주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 니다. 99퍼센트 주님의 역사에 1퍼센트 우리의 노력과 행위가 더해져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모두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주님이 100퍼센트 일하시려면 우리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 자 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변할지 몰라. 열심히 하면 달라질지 몰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구원받을만한 상태에 있 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발버둥치고 울부짖지만, 아직까지 그들 속에 . ‘내가 십일조만 잘 내면, 술만 끊으면, 주일만 지키면, 율법을 잘 지키면 내 신앙에 변화 가 올 것이며 천국에 갈것이다.’라는, 나름대로의 가느다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무 소망이 없고 기대가 없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믿는 믿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기에, 사마리 아인에게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가 꺼려하는 사람이었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망이 없었으므로 사마리아인에게 자기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는 거반 죽게 되었을 때 ‘혹시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구원해 줄지 몰라.’ 하는 가느다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사장이 그리로 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저 제사장이 나를 도와 줄 거야 !’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말 애처로운 눈으로 제사장을 쳐다보면서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 습니다. 제사장이 오다가 드디어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구원해 주기는커녕 고 개를 돌리고 피해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도 만난 자의 마음에서 소망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는 레위인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까 제사장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았지만, 저 레위인은 나를 구원해 줄지 몰라!’ 하 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레위인 역시 그를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강 도들이 그 사람의 옷과 돈을 빼앗은 후 때려서 거반 죽게 만들었는데, 강도들 뒤에 온 제 사장이나 레위인은 그에게서 한 가닥 남은 소망마저 빼앗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오기 전에는, 강도 만난 자는 ‘혹시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구원해 줄지 몰라.’ 하는 가느다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갈 때에 그는 정말 그들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평민이 아닌 제사장 과 레위인이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에, ‘아, 이제 누가 와도 나는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강도 만 난 자의 마음에서 ‘누군가가 와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이다.’는 마지막 소망이 무너져 내려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이 시작됩니다. 사마리아인이 이른 거기는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 아인을 만났던 그 마음의 위치를 말합니다. 소망이 모두 무너져 버린 그 자리에 우리 마 음이 이르러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부지런히 다니면서 누구를 찾고 계시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 하며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제 나는 아무 소망 이 없다. 내게는 희망이 없다. 내가 무얼 해도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처럼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을 주님은 찾아다니시며 그들을 찾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간 것은 그 당시 많은 종교가들과 성경을 가르치는 율법사, 서기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 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피를 쏟아서 그 피로 우 리의 죄의 상처를 싸매주신다는 말씀이며 기름과 포도주는 성령과 피를 말합니다. 성령 이 오셔서 주님의 피를 믿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우리 방법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하십 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방법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고 자기 생각과 달라도, 자신을 주님께 맡겨 버립니다.. 하지만 어떤 작은 희망이나 소망이 있 는 사람은, 자기 방법을 앞세워서 주님이 그 방법에 맞게 역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님은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어떤 사람이 강 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곳에 이른 것을 봅니다. 강도 만난 자가 실낱같은 마지막 소망도 끊어져 ‘나는 이제 죽었다.’ 하는 데에 이르렀을 때, 그의 의견과 전혀 상관없이 사마리아 인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가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후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자기의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생각을 버려야 합 니다. 아직도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버리기 어렵지만, 강 도 만난 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내가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가십니다. 아무 소망이 없어서,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전부 헛 될 뿐이었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소망까지 무너져버린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은 먼저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를 아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천지차이가 됩니다. 자신의 종교 생활을 의지하는 사람은 온 율법을 행하다가 그 하나에도 거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 지키지도 못할 불우이웃돕기의 종교적 짐을 지게 될 것이고 자신을 강도만난 처지에 있는 사람인줄 안다면 먼저 자신을 구원해 줄 선한 이웃인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강도만난 자리에서부터 주막까지는 얼마의 거리인지 모르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태우고 자기는 고삐를 잡고 주막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죽게 된 사람을 치료해 줄 뿐 아니라 이 사람을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려다 주고 주막집 주인에게 그렇게 자상하게 부탁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을 치료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 나 선한 사람입니까?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님은 우 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까지 오셔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애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는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주막이란 것은 여관입니다. 나그네 들이 잠깐 쉬어가는 곳입니다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우리가 잠깐 쉬어갈 곳, 예수님이 우 리를 구원하신 이후에 우리의 영혼이 깊은 상처를 계속 치료 받고 쉴 곳을 두었는데 거기 가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는 이 말씀 속에 구원받은 우리들이 생각해야할 것도 있습니 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을 받은 자만이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김같이 남도 불쌍히 여기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함 같 이 우리도 용서할 수 있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함 같이 우리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주 님이 행한 것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일서 2장 6절)

 

주님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한다 하는 자입니다. 그는 주님의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먼저 주님께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다 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한 이웃인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일인 것입니다.

 

요새 우리나라에는 동남아계 사람들이 불법체류하며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 다. 그들은 여러 조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방송을 보니까 방글라데시에서 온 청년이 6년 이상을 체류하며 고생하다가 방송국의 주 선으로 그 가족을 만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려움을 필요할 때 마다 도와 준 신부가 있었습니다. 6년 동안을 도와주었기에 이 방글라데시인이 참으로 고마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에게 혹시 이 사람에게 전도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 사람이 믿는 신은 “알라‘고 나는 ”하느님“을 믿는데 전도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안식 을 빼앗는 가혹한 행위라 생각되어 한번도 말해본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그의 영혼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구걸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은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 가시오" 하며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이 사건을 들어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 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 희 앞에 섰느니라(행4:8-9)

 

육신의 구걸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영혼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중요함이 변질되지 않도록 구제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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