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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6:4-6

 관리자
2010.02.17 07:19:25 :241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행위로 끝마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그 행위여하에 의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거짓된 가르침은 끊임없이 교회 안에 스며드는 이단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난해한 구절이 있어 경계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한 성향들을 은근히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들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6:4-6)


이 구절에 대한 바른 해석은 먼저 그 구절과 용어를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비췸을 받다."라는 말을 완전히 중생한 것을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비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용어가 말하는 것은 다만 한 때 그들이 복음의 빛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보면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예로, 세례(침례)받은 사람들은 "비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보증은 될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우선 "맛보다"는 말을 너무 격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맛보다"로 번역된 말은 "친숙하게 된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체험"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맛보다"라는 말을 향취를 맡아보는 정도로 해석하여 그들이 그것을 씹어 삼키기만 하였다면 잘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으나 그러한 해석은 다른 성경 귀절과 상충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주님은 단순히 입으로 죽음을 맛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떠한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맛보신 분입니다. 그는 죽음의 의미를 알았던 분입니다. 따라서 "맛보다"는 의미를 격하시켜 이 말씀을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들, 이 사람들은 하늘의 은사에 대한 어떤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은사라는 말은 복음이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고 가져다 주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에 속한 어떤 것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에 참예한자"라는 대목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이 구절은 가장 어려운 것인데, "성령에 참예한 자"들이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의미만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예한 자" 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코필드(Scofield)성경에는 참예"(partaker) 라는 말이 '∼을 따라서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임을 지적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참석자" 또는 "함께 나누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동업자"또는 "파트너" 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파트너는 어떤 다른 사람과 주어진 어떤 경 우에 함께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국면에서는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성령께서는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그를 동업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 선지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돈을 생각하고 예언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어떤 능력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도 일시적으로 성령에 참예한 바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결국은 베드로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 되어 있나니"(벧후 2:15-17)



우리는 그와 유사한 실례들을 신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멸망의 자식이었는데, 성령에 참예한 자가 되었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눅 10:17-19)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하는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도 그들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도 다른 사람들이 귀신을 좇아 내었던 것처럼 그 일을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너희가 다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요13:10-11)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러한 류의 참예를 한 것뿐입니다.마7:21-22절은 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러한 놀라운 일을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사람을 그와 동행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느낌에 있어서, 많은 권능에 있어서, 여러 가지 국면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참예한 자'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건설할 영원한 나라의 능력을 말하는데, 부흥이 일어나는 시대에서와 같이 성령이 부어지는 때마다 교회는 「내세에 속한」어떤 것을 체험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내세의 능력 중 어떤 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친 부흥의 역사는 이것에 대한 풍부한 확증을 제공해 줍니다. 성령이 부어지는 경우마다 언제나 말하자면 「조류처럼 밀려오는 사람들」, 곧 잠깐 동안은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리스도인 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불신자가 성령에 전혀 감동 받지 못한다는 것은 순전한 기만입니다. 성령의 보다 일반적인 감화들은 복음전도를 하는 전도집회에서 자주 보여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회심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후에 가서 그들이 전혀 변화된 것이 아니었다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이한 감정을 가졌다고 말하고 진리를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후에 가서는 "나는 전에 내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심리적인 체험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러합니다. 이 사람들은 결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중생치 못한 사람들이요, 그들은 단순히 어느 기간 동안에 '참예'의 특이한 조류에 들어서 함께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이 어떤 집회에서 '앞으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자기들은 중생하였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어서 예고하신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직 가치 있는 유일한 땅은 마지막의 경우인 열매를 맺은 땅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땅입니다.



타락한 자들은


「타락하면」이라는 말을 쓸 때 거의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이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단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또 히브리서 10장 26-28절에서 언급하는「짐짓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어떤 특별한 죄를 짓는 것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때 믿는다는 말을 한다음에 그 믿는 다고 하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조롱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일은 이 용어들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6장4-6절이나 히10장26-28절에 있는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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