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19)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나의 마음에 대입해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또 내 사랑을 받은 대상이 그것에 감복하여 자유의지로 나를 사랑하기로 선택하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고 우리의 자유의지로 그분을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옛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지만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는 그 명령이 빠졌습니다. 누군가 의무적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사랑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 만족을 얻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을 사랑해요."
"왜죠?"
"그게 법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속성상,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유의지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기반으로 선악과를 생각해 보면 마음 깊이 도사리고 있던 의구심이 해결되기도 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그걸 따 먹을 것을 아시면서도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는 뭐란 말인가?"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의 순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무슨 짓을 해도 타락할 수 없는 곳에서 타락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세상에 여자가 나 하나라 어쩔 수 없이 나를 선택한 남자가 정말 나를 선택한 것일까요? 다른 여자도 있는데 나를 선택하는 것이 선택이지요. 같은 이치로 타락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타락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거룩입니다.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순종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불순종할 자유가 없는 곳에서의 순종은 의미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순종할 자유도 주신 것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우릴 시험하셨다!'라고 이해하면 종교인이고 '나에게 그런 자유까지 주셨다!'라고 깨달았다면 신앙인입니다. 둘의 차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의도가 사랑임을 아느냐, 모르느냐이고요.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참 사랑의 속성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의 선택을 원하신다는 것 자체가, 사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엡 3:18). 놀라운 은혜이며 너무나 큰 기적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조금 더 이해되고 계시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