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택하는 것은 의무감이나 고역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희망을 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을 새롭게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해 주셔야 한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모든 것을 받았으니, 그것을 더 잘 신뢰하기 위해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가 생각을 새롭게 하지 않기로 오늘 결정하더라도 주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실 겁니다. 또한, 방금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전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지 않고 생각을 새롭게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딤후 2:13). (우리 삶은 고달파지겠지만.... )
원래부터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우릴 사랑하신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 쪽의 어떤 변화가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것을 알면 조건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더 가까이 가고만 싶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시는 사역, 전도나 봉사, 신앙생활, 다 때려치워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는 영향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한 뒤, 그 사랑에 감복하여서 하고 싶을 때 하는 사역과 봉사만이 의미 있고 진짜입니다. 그리고 진짜에만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생각을 새롭게 하는 신앙생활을 '별로 하고 싶진 않지만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되니까 싫어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라도 시작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의무감에 하는 것이 됩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이렇듯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자신의 의가 되고 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깨달을까요?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계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기에(엡 3:18)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번개를 맞듯이, 어디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를 내리는 것은 하늘의 전권에 달렸으나 그 비를 맞고 싶으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듯이, 계시란 온전히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것이 맞지만 우리 쪽에서도 계시를 받을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그 자세란 내 쪽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의 시간을 갖고, 계시를 구하는 마음, 등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애초부터 주님의 사랑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듯, 마음이 허전할 때면 주님의 사랑으로 달려가는, 하나님과 참 사랑의 관계 가운데로 우리 모두가 들어가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