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 (눅 1:78)
사가랴의 예언은 요한이 할 일은 주 앞에 앞서 가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사함을 얻게하는 구원임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인애적인 긍휼' σπλαγχνα ελεους θεου (스프랑크나 엘레우스 데우)이라는 것이다. 긍휼(스프랑크나)이라는 단어는 '내장이나 창자'를 뜻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이 '스프랑크나'(긍휼)를 더욱 발전된 의미로 사용하는데,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와 사랑을 나타내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고후 7:15)
바울은 사역자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의 환대에 대하여 깊은 심정, 사랑하는 마음(스프랑크나)를 가지고 있다고 그를 칭찬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단순히 긍휼이나 동정이 아니라 좀 더 고차원적인 기독교인 덕목으로서,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사랑, 혹은 심정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긍휼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심정을 담은 긍휼,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아픔을 가지고 바라보시는 주님의 심정을 말한다.
바울은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특별히 자신과 성도들의 마음(스프랑크나)을 평안하게 해준 빌레몬을 칭찬한다.(몬1:17,20)
그리고 바울은 돌려 보내는 노예 오네시모에게 이 단어를 다시 사용하여 그는 나의 스프랑크나[심복](몬 1:12)이라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선포한다.
우리 모두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서로의 깊은 마음이 되어주고,서로를 신뢰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교회공동체의 성도 각자는 서로의 '스프랑크나' 라는 사실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며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본질적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랑과 신뢰를 말하기 위해서 긍휼(스프랑크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당신도 이러한 스프랑크나를 가지고 교회에서 살아가라.(골 3:12) 에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죽으셨다.
사랑받는 사람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든다. 그런데 더 나은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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